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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이야기

애마는 달리고 싶다_무명초

모처름 시간내어 잠시 남강뚝방을 자전거 타고 한바퀴 하고 왔습니다.

자전거 타기에는 좋은 날씨 였습니다.







위 대교의 명칭을 공모 했을때,  무명초도 공모에 참석 했는데,

진주 혁신도시가 형성되고, LH본사가 있기때문에,

  " 혁신대교"  라고 한편을 내었는데.채택되지 않았습니다.


김시민 대교로 명명한것은,

진주성 대첩당시 왜구들과 싸우다 장열히 전사하신,

김시민 장군을 기리기 위함 이라 합니다.


__아래 자료는 옮겨온 것입니다 __


                  


1592년 10월 제1차 진주성 전투에서 큰 공을 세운 김시민의 전공을 기록해 놓은 김시민 장군 전공비(金時敏將軍戰功碑)는 현재 진주성 내의 계사순의단(옛날에 충민사가 있었던 자리) 옆에 비각을 마련하여 보존하고 있다.

비는 받침대 위로 비의 몸통을 세운 간결한 구조로 되어 있으며, 비의 규모는 높이 277cm, 비의 폭 99cm이다. 1619년 7월에 비를 세웠으며, 성여신이 비문을 짓고, 한몽인이 글씨를 썼다.

김시민은 1554년 8월 27일 지금의 천안시 병천면 가전리 잣밭마을에서 출생했다. 1578년에 무과에 급제하여 군기시에 입시했고, 1591년 진주판관이 되었으며, 이듬해 임진왜란을 맞았다. 이 무렵 진주목사 이경이 병사하자 김성일은 김시민으로 하여금 진주목사직을 대행토록 명했다.

김시민은 의병장 김면의 요청에 따라 거창으로 가 사랑암 부근에서 일본군을 크게 무찔렀고 이 공로로 1592년 7월 26일 진주목사에 임명되었다.

목사 김시민은 성안의 백성들을 위로하며 민심을 안정시키고 성을 수축했으며 임진왜란이 한창이던 그해 8월에 정식으로 진주목사에 취임하여 병기를 정비하는 등 진주성을 지키는 방책을 강구했다.

또 9월에는 경상남도 진해로 출정하여 적을 물리치는 등 전공을 세워 경상우도 병마절도사에 임명되었다.

10월 6일 일본군은 경상우도의 요충지인 진주성에 대한 공격을 시작했다. 이에 성 안에 있던 부녀자와 노약자까지 모두 나서 일본군과 대치하게 되었는데 적군은 2만여 명이었으나 김시민의 군사는 3,800여 명에 불과했다.

악전고투 끝에 일본군을 물리친 10월 9일 전투지역을 순시하던 김시민은 죽은체하고 사체 속에 숨어 있던 일본군의 저격을 받고 이마에 총탄을 맞고 쓰러졌다. 상처가 심각했지만 김시민은 이 사실을 함구하고 치료를 받으면서 국사를 근심하다가 39세의 나이에 운명했다.[김시민 장군의 사망일시는 임진잡록에는 10월 18일로 되어 있고, 족보에는 12월 26일로 되어 있다. (사)충무공김시민장군기념사업회 홈페이지(
http://www.kimsimin.or.kr/, 검색일 2011. 06. 10)]

김시민은 영남에서 호남으로 진출함에 있어 중요한 길목이 된 이곳을 지킴으로써 일본군의 호남진출을 막아내어, 불리했던 당시의 상황을 뒤집고 다시 전열을 가다듬는 계기를 마련하기도 했다.

그는 1604년에 선무공신 2등에 추록되었으며, 1702년에는 영의정의 직위와 ‘충무공’의 시호가 내려졌다.

김시민 장군 전공비는 1972년 2월 12일 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1호로 지정되었다.

김시민 장군 전공비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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